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 (문단 편집)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후 === [[프란츠 요제프 1세]]와 결혼하면서 오스트리아의 황후가 된 엘리자베트는 [[대타협|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이중제국 체제를 이루게 되자]] 헝가리의 왕비로 즉위했다. 그녀가 정치에 개입한 것은 단 한 번이었는데, 1867년 헝가리의 독립내각 구성을 강력하게 지지한 것이다. 일전에 헝가리를 방문했을 때 헝가리인들이 보여준 환영에 큰 감명을 받아 헝가리를 매우 좋아했고, 다른 이유는 사이가 나빴던 시어머니 조피가 혁명에 가담했던 헝가리를 싫어했기 때문. 시어머니를 굉장히 싫어한 엘리자베트는 시어머니 속을 뒤집으려 작심하고 헝가리의 극성팬을 자처했던 것. 그러나 바이에른에서 자유롭게 생활해온 엘리자베트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엄격한 황실 예법에 잘 적응하지 못해 방황했다. 허례 허식과는 거리가 먼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시절에는 [[호프부르크]]의 예법은 이웃 나라 [[프랑스 왕국]]이나 [[프로이센 왕국]]에 비해 무척이나 자유롭고 편안했으나, 프란츠 요제프 대에 이르러서는 궁정 문화가 엄청나게 보수적으로 변해 있어 숨 쉬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여기에 시어머니가 된 이모 [[조피 프레데리케 폰 바이에른|조피 대공비]]와의 갈등도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게다가 남편 프란츠 요제프도 워커홀릭에 마마보이였던 탓에 엘리자베트의 편이 되어주지 않아 그녀는 신혼 초기부터 고독하고 외롭게 지냈다. 16세에 결혼한 어린 엘리자베트는 처음엔 조피에게 반발하지 못했지만 자기 주장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고, 아들 [[루돌프 프란츠 카를 요제프|루돌프]]를 낳아서 궁정에서의 입지가 강화된 다음에는 정신병원을 후원하거나[* 엘리자베트 자신이 평생 우울증과 온갖 신경증에 시달렸기 때문에 정신의학에 큰 관심을 가졌다.] 국내외 여행 등 이런저런 다양한 활동을 한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황실의 공식적인 행사는 온갖 이유를 갖다 붙이며 피해서 황후답지 못하다는 평을 들었다. 하지만 엘리자베트에게 약했던 남편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자신이 도와주지 못해 아내가 힘든 결혼 생활을 보낸 것을 자책해서 그녀의 행동을 막지 않았다. 엘리자베트가 '''남편을 자기한테서 떼어놓으려고 일부러 정부를 소개시켜줬다'''는 이야기도 있다. [[프란츠 요제프 1세]] 항목 참조. 나랏일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아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고 약해진 남편을 돌봐주기는 귀찮고, 놓고 가자니 심한 가책을 느껴 돌봐줄 사람을 대신 고용한(?) 후 자기는 마음 놓고 도망간 셈. 아이러니한 것은 [[가해자가 된 피해자|시어머니에게 억압 받던 그녀도 자기 며느리인 벨기에 공주 스테파니를 싫어했다는 것이다]]. 이는 조피 대공비의 사랑을 받으며 엘리자베트와 갈등을 빚던 동서 [[멕시코의 카를로타|샤를로트]]([[벨기에]] 공주로 [[막시밀리아노 1세|막시밀리안 1세]]의 아내)가 [[벨기에의 스테파니|스테파니]]의 고모였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21세기 들어 프란츠 요제프 1세와의 불화에 대해 새로운 연구가 진행되었다. Family Tree DNA라는 집단의 DNA 연구(https://www.familytreedna.com/public/habsburgfamilyproject)에 의하면 오스트리아 출신 미국인인 찰스 홀트(Charles Holt, 1865~1947)가 프란츠 요제프의 사생아일 확률이 매우 높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의 부계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는 것. 그녀가 찰스 홀트의 존재를 알았는지는 현재의 기록으로서는 알 수 없지만, 찰스 홀트가 태어난 1865년 이후로 엘리자베트 황후는 헝가리 독립을 지지하고(1867년), 막내인 [[마리 발레리 마틸데 아말리에|마리 발레리]]를 출산(1868년)했다. 루돌프를 낳은 이후 임신하는 것을 극히 꺼리다가 갑작스럽게 막내를 갖기로 결정한 것인데, 궁정에 머무르지 않고 평생 여행을 다니기 시작한 건 루돌프를 출산한 이후다. 더는 아이를 낳지 않겠다며 아예 남편을 피해 빈을 탈출하기 일쑤였던 것. 엘리자베트는 결혼 후 조피[* [[조피 프레데리케 폰 바이에른|시어머니]]가 묻지도 않고 첫 손녀라며 자기 이름을 따서 세례식까지 마쳐버렸다.], [[기젤라 루이제 마리|기젤라]], [[루돌프 프란츠 카를 요제프|루돌프]], [[마리 발레리 마틸데 아말리에|마리 발레리]] 등 4명의 아이를 낳았다. 첫째 조피는 헝가리 여행 중 요절했는데 엘리자베트는 딸의 죽음에 어린 아이를 무리하게 여행에 동반한 본인 탓이라 자책하며 자식들을 외면하게 되었다. 그 결과 유일한 아들 루돌프는 성인이 된 후 세간에 '마이어링 사건'으로 알려진 밀월여행 끝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기젤라와 마리 발레리만이 엘리자베트의 사후까지도 살았다. 엘리자베트는 자기 손으로 키운 막내 마리 발레리에겐 지나칠 정도로 애정을 쏟았지만, 시어머니 [[조피 프레데리케 폰 바이에른|조피 대공비]]에게 기젤라와 루돌프를 싹 떠맡겨 놓고는 그들에게 철저히 무관심했다. 기젤라와 루돌프에게도 아예 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편애는 아들 루돌프가 자살하게 된 원인 중 하나로 생각되며 딸 기젤라를 [[정략결혼]]의 도구로 사용하기까지 했다. 엘리자베트의 막내 동생 막시밀리안은 작센의 공녀 아말리에를 사랑하게 되었는데, 아말리에는 엘리자베트의 친척[* 외사촌 [[루이트폴트 폰 바이에른|바이에른의 루이트폴트 왕자]]의 아들.] [[레오폴트 폰 바이에른|바이에른의 레오폴트 왕자]]와 약혼 직전이었다. 원래 기젤라의 이른 결혼을 반대하던 엘리자베트는 경쟁자인 레오폴트에게 아말리에 대신 자신의 딸 기젤라와 결혼하길 권했고 그렇게 15세의 기젤라는 레오폴트와 결혼했다. 엘리자베트는 연애결혼을 하고도 16살 어린 나이에 결혼한 것 자체를 한탄했지만 정작 자신의 딸을 그보다 더 어린 나이에 시집 보낸 것. 아이러니하게도 기젤라는 비록 남편의 외모가 못생긴데다 [[정략결혼]]이었지만, 금혼식까지 치를 정도로 엘리자베트의 자녀들 중 유일하게 행복한 결혼 생활을 누렸다. 그렇게 애정 없는 딸을 시집 보낸 후 시씨는 딸과 외손자들에게도 철저하게 관심 끊었다(...) 부모에게 제대로 된 애정을 받지 못하고 의지해 자란 루돌프와 기젤라는 깊은 우애를 갖고 있었다. 루돌프는 엘리자베트의 자식들 중 그녀와 가장 닮은 아이였으나, 아들의 약혼식에도 참여하지 않을 정도로 무관심한 어머니 탓에[* 며느리 될 [[벨기에의 스테파니|스테파니 공주]]가 보기 싫어서 일부러 그랬을 가능성도 있다고.] 두 사람 모두 살아서는 그 사실을 몰랐다. 그러나 1889년에 루돌프가 자살하자 실의에 빠져 남은 평생을 검은 상복을 입고 이전보다 더욱 도피성이 짙은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1888년 아버지를, 다음 해 아들을 잃은 시씨는 1890년에는 언니, 1892년에는 어머니, 1893년에는 막내동생을 떠나보냈다. 연달아 겪는 비극에 살아갈 의지를 잃으며 그러지 않아도 좋지 않았던 몸 상태가 더 나빠지기 시작했고, 여행도 쉬지않고 계속 다니다보니 죽을 때까지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다. 딸 마리 발레리는 기젤라와 자신은 힘을 다해 엘리자베트를 위로했지만 그녀가 결국 루돌프를 잃은 충격을 이기지 못했다고 썼고 주변인들에게 자신이 죽음과 자살을 원한다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게다가 일련의 사건 이후의 여행에는 경호원을 대동하지도 않고, 가명을 사용하며 소수의 시녀들만을 동반했다. 이 때부터는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유럽 밖 모로코, 이집트, 알제리 같은 나라들도 방문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들이 결국 엘리자베트의 죽음을 부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암살당한 순간에도 엘리자베트는 경호원은커녕 시녀 한 명만 대동하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